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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리뷰] 올해로 77주년 맞은 제주4·3 역사의 흔적 ⑤ 낙선동 4·3성터와 반못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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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타임스=라라 리뷰어]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무려 7년 7개월 동안이나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해발 200~600m 사이 중산간 지대에 자리한 마을들은 소개령이 내려져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지금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란 세계자연유산 제주의 핵심부에 위치한 세계유산 마을인 선흘리 마을도 1948년 11월 20일,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모두 전소되었다.

 

갑자기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은 근처 선흘곶자왈 안에 자리한 자연 동굴로 숨어들거나 들판에 임시 움막을 짓고 삶을 이어가야 했다.

 

낙선동 4·3성터

 

하지만 이들이 은신했던 자연 동굴은 잇따라 발각되고 말았다. 다행히 해변마을로 도피해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잡혀와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지금의 ‘낙선동 4·3 성터’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낙선동 4·3 성터

 

낙선동 4·3성터, 주민들의 거주공간? 효율적인 감시·통제를 위한 전략촌

살아남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위해 낙선동에 성을 쌓은 건 1949년 봄 약 한달간이었다. 하지만 이 성은 주민들이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쌓은 게 아니었다. 경찰들이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을 들어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성을 쌓게 한 것이다. 

 

낙선동 성과 비슷한 돌성은 다른 지역에도 쌓아졌다. 경찰이 주민들과 유격대간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곳곳에 전략적으로 만든 돌성이었다. 주민들이 쌓은 건 자신들이 거주할 공간 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의 주둔소도 함께 쌓아야 했다. 주둔소는 그래도 크기가 작은 편에 속했지만, 사람들이 거주할 공간은 마을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훨씬 더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성을 쌓는 약 한달 간 선흘리 사람들은 축성을 위한 돌을 등에 이고 날라야 했다. 인근 밭담이나 산담에서 돌을 가져왔고, 그것도 부족하면 돌절구나 주춧돌까지 가져와야 했다.


성을 쌓는 약 한달 간 선흘리 사람들은 축성을 위한 돌을 등에 이고 날라야 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낮엔 경찰의 감시 하에 성을 쌓고, 어두워지면 함덕으로 내려가 잤어요. 그리고 나서 다시 날이 밝으면 낙선동에 성을 쌓으러 오고. 한달 정도 그렇게 살았죠.”

등짐을 져 돌을 날라야 했기에 주민들의 어깨와 등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낙선동의 축성 작업에는 선흘리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조천면 관내의 다른 마을 주민들, 부녀자, 심지어는 초등학생들까지 동원됐다고 한다.


이렇게 쌓은 낙선동 성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 정도로, 총 500여 m의 직사각형 모양을 띠고 있다. 

 

고화봉 씨의 당시 기억에 따르면 “성 밖으로 너비 2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판 후 가시덤불을 놓았어요. 폭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죠.” 단순히 성 쌓는 일만 했던 게 아니란 의미다.  

 

한 달간의 축성 작업은 1949년 4월 모두 끝났다. 사람만 겨우 들어가 몸을 눕힐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다. 말이 마을이었지, 새로운 감시와 통제를 위한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함바집 한 동에 다섯 세대, 최대 250세대까지 거주

이렇게 성 내에서 주민들이 거주하던 공간을 ‘함바집’이라 불렀는데, 함바집 한 동마다 다섯 세대가 살았다 한다. 함바집은 길게 돌담을 쌓고 중간중간에 나무기둥을 세워 나뭇가지를 얹은 지붕에 띠를 덮어 완성한 공간이라 한다. 칸막이는 억새를 엮어 세웠는데, 방, 마루, 부엌의 구분이 없고, 몸을 굽혀야 겨우 출입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처음 축성됐을 때는 50세대가 살았는데, 이후 점점 사람이 늘어 250세대 정도의 주민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성 내에서 주민들이 거주하던 공간을 ‘함바집’이라 불렀는데, 함바집 한 동마다 다섯 세대가 살았다.

 

주민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오려면 통행증을 받아야 했고, 밤에는 통행금지가 시행됐다. 

 

또 매일 밤 주민들에게 보초를 서게 했는데, 보초를 보는 이들은 대부분 16살 이상 여성과 노약자들이었다 한다.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희생돼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 자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노인들이 보초를 서다 실수라도 하면 파견 나온 경찰들은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했다 한다. 


성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벽 중간에 안과 밖이 보이는 조그만 창이 나 있다. 밖으로 총구를 겨눴던 구멍이라 한다. 그리고 눈썰미가 있다면 돌로 쌓은 성벽이지만 성벽의 가운데 부분 아치가 살짝 다른 모양을 한 곳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드나들던 출입문이라 한다.


성에서 밖으로 총구를 겨눴던 구멍(왼쪽)과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출입문(오른쪽).

 

낙선동 4·3 성터가 자리한 곳은 본래 선흘리 마을이 있었던 곳이 아니다. 선흘리 마을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당시는 알선흘로 불렸고, 근처에 봉냉이동산, 돛바령 등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한다. 조금이라도 해변과 가까운 곳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선흘리 주민들이 이 성에서 벗어난 건 6년 후인 1956년이라 한다. 1956년 통행 제한이 풀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살던 마을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원래 살던 곳으로 가지 않고 성 안에 남아 그대로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 지금의 낙선동 사람들이다.


낙선동 4·3 성터는 당시 축조된 성 가운데서도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유적 중 하나라 한다. 일부는 허물어지고, 과수원 경계표시를 위해 옮겨 쌓은 부분도 있다는데, 지난 2007년 전체적인 원형을 복원했다. 성터 위로 올라서면 마을 먼 곳, 함덕해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성터 위로 올라서면 마을 먼 곳, 함덕해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선흘 반못굴, 초토화된 마을 주민들의 임시 피난처

반못굴은 선흘리 사람들의 임시 피난처로 사용된 곳으로 ‘도틀굴’이라고도 불린다.

선흘리 동백동산 안에 있어 동백동산 습지센터에서 탐방로를 따라 200여m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에서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아기를 안고 숨어든 곳이 바로 이 ‘반못굴’이다.

 

영화에서처럼 반못굴은 실제로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가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된 후, 주민들이 피신했던 곳이다. 주민들 중 일부는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명령에 따라 해안마을로 피난을 떠났지만, 기르던 가축과 가을걷이한 곡식을 두고 갈 수 없었던 많은 주민들이 임시 피난처를 찾아 이 굴로 숨어들었다. '며칠만 숨어 있으면 사태가 끝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선흘곶자왈 안의 반못굴.


당시 반못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총 25명 정도,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었다. 선흘곶자왈은 숲이 무성한 지라 일부 주민들은 인근의 다른 동굴에 은신했다.

 

하지만 불과 4일 만인 11월 25일, 굴이 발각되면서 은신해 있던 주민들은 체포되고 만다. 그 중 18명은 밖으로 끌려나오자마자 그대로 총살됐고, 다른 이들은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한다. 

 

그리고 다음날 '목시물굴'에 숨어 있던 주민들도 발각돼 40여명이 총살됐다.


선흘곶자왈 안의 반못굴.

 

선흘곶자왈 안의 반못굴.

 

겨울 끝자락에 찾으면 굴 바깥의 동백나무가 꽃을 피운다. 

하지만 현기영 작가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읽고 나니 동백꽃이 더 이상 그저 아름답기만 한 꽃은 아닌 무언가로 다가온다.


선흘곶자왈 안의 반못굴.

 

"겨울철 그 고장에 관광 갔던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눈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뒹구는 붉은 낙화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 그러나 그 악한 시절 이후 내 정서는 왜곡되어 그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니, 꽃잎 한 장씩 나붓나붓 떨어지지 않고 무거운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__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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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동 4·3 성터

- 위치 :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흘서5길 7

- 전화 : 064-783-4373


반못굴

- 위치 :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177


<lala_diman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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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김우선I기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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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선I기자
2025-04-30 08:04
윤 정부의 내란이 성공했다면 4.3과 같은 사태가 또다시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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